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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강화도습지연대 카페 「책 이야기」 게시판 글 3건 · 최신순

2010.09.30육식의 종말
우리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농경사회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데 소를 이용했다. 농사를 하는데 있어서 소는 몇 사람 몫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소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또 소는 때로 자식들 교육을 위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한 때 소 판 돈으로 자식들 등록금을 마련한다고 해서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한 시절 쇠고기를 마음껏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때에는 부잣집 외에 보통 사람들은 명절이나 집안에 큰 행사가 있는 날만 쇠고기를 맛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사람들은 시시때때로 쇠고기를 먹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우리가 가난한 시절을 이겨내고 나라가 부유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쇠고기는 예전에 우리가 시골의 외양간에서 쇠죽을 먹여서 키우던 그런 소들이 아니다. 지금 쇠고기를 먹으면서 예전의 외양간 소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축산 마케팅 홍보자는 그러한 이미지를 홍보하고 각인시키고 싶겠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국민들은 쇠고기를 많이 먹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비량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쇠고기를 먹는 양이 늘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스스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 된 척도라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면 능력껏 쇠고기를 선택해서 먹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엇을 먹건 그것은 먹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쇠고기 소비의 급증은 그렇게 단순히 개인의 선택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경제적인 능력과 입맛에 따라 쇠고기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뒤에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쇠고기와 관련된 불편한 진실을 『육식의 종말』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신성시되던 존재에서 악마로 추락하는 소 오래전부터 나약한 인간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보호해줄 대상을 신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신에게 종족의 번영을 기원했다. 농경민족들이 믿었던 신앙의 대상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풍작을 이루는데 관여하는 대상들이고 또 종족의 무궁한 번식을 기원할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태양신 바람신 물의신 등이 대표적이었고 농사에 큰 역할을 한 소 또한 신성시 하였다. 잭 랜돌프 콘라드(Jack Randolf Conrad)에 따르면 소 숭배의식은 이집트로부터 나일 강을 따라 점차 북아프리카로 확산되어 최종적으로 동아프리카 전역과 현재의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까지 이르렀다. 위 지역뿐만 아니라 농경민족은 대체적으로 소를 신성시하였다. 농경민족이 소에 대하여 신성시하는 것이 변하지 않는다면 소를 마구잡이로 도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농경민족을 정복한 유목민족은 농경민족이 믿던 많은 신들을 사악한 존재로 만들어 자기부정을 하도록 만든다. 그 대상에는 다산의 상징이던 뱀을 포함하여 소 등이 포함된다. 447년 톨레도 공의회(The Council of Toledo)에서 교회는 최초로 악마에 대한 공식적인 묘사를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발표한다. "머리의 뿔, 갈라진 발굽 혹은 갈라진 하나의 발굽, 당나귀 귀, 무성한 털, 발톱, 이글거리는 눈, 무시무시한 이, 거대한 음경, 고약한 유황 냄새가 특징인 크고 검은 험악한 형체가 악마이다." 세계 역사를 바꿔버린 영국인들의 쇠고기에 대한 식탐 유럽에서 가장 쇠고기를 탐하는 민족은 영국인이었다. 중세 영국의 귀족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호화로운 쇠고기 만찬을 위해 개인의 재산과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부유층들은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의 정도가 그의 지위와 특권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근대 초기에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계급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며 이들 또한 귀족들의 육식생활을 갈망했다. 산업혁명 직전 영국은 세계적인 쇠고기 육식 생활의 중심지로 자리 잡으며 1726년 즈음에는 런던 시장에서 해마다 10만 마리의 소들이 도살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급속히 늘어나는 쇠고기 수요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17세기 영국은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 첫 번째 식민지화 된 목초지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이며, 뒤이어 북아메리카,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초원이 영국에 쇠고기 공급을 위한 식민지가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토착민들은 대형화되는 소 사육지에 땅을 빼앗기고 고향을 떠나 도시의 공장의 미숙련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미서부개척사에 감추어진 축산업 발달사 신대륙으로 발견될 당시 북미 대륙은 버펄로로 뒤덮여 있었다. 이곳에 스페인의 사제들이 들여온 소 떼들이 드넓은 목초지에서 늘어나 1830년대에 텍사스에는 대략 10만 마리의 소들이 사방을 떠돌아다녔고 30년 후 남북전쟁 직전에는 350만 마리까지 폭증하였다. 텍사스에서 쇠고기의 소비자가 있는 아이오와 주나 일리노이 주가 있는 북쪽으로 소떼를 이동시키는 큰 일 이었다. 카우보이들이 소떼를 이동시키는 중에 약탈범을 만나기도 하고 소들이 여행에 지쳐 바짝 말라버리기 일 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67년 조지프 맥코이는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를 생각하게 된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만 있으면 미대륙 전체에 있는 소떼들을 소비지로 손쉽게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텍사스 쇠고기의 원활한 공급은 더 많은 수요를 창출하게 되었고 기존의 소들만으로는 엄청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목축업자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개발해야 했고 그곳은 서부 평원이었다. 하지만 광대한 서부 초원에는 버펄로와 인디언들이 있었다. 18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서부 초원에서 버펄로의 수를 세는 것 보다는 숲의 나뭇잎 수를 세는 것이 훨씬 쉽다고 할 정도로 버펄로의 행렬은 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1871년에서 1874년 사이의 버펄로 전문 사냥꾼들에 의한 대량 학살로 버펄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어떤 사냥꾼은 1시간 15분 동안 사격을 계속 했고 사격이 끝나자 88마리의 버펄로들이 죽은 채 나뒹굴었다고 한다. 이들 사냥꾼들은 가장 가격이 나가는 가죽만 벗겨서 장당 1~3달라를 받고 팔았으며 평야는 수많은 버펄로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가 진동을 하였다. 인디언을 내쫓기 위해 30년 넘게 싸움을 하던 미육군도 인디언의 식량줄이던 버펄로를 몰살시키는 것이 인디언을 몰아내기 위해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버펄로 사냥에 동참한다. 이로 인해 식량줄이 끊긴 인디언들은 생존을 위하여 미정부에 굴복하고 보호지에서 정부의 식량 배급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인디언이 정리되자 동부에 있던 소 목축업자들은 서부로 이동하게 된다. 서부는 동부와 달리 들판에 질 좋은 천연 목초가 우겨져 있었고 또 겨울인 1~3월에도 기온이 온화하여 소를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60년대 유럽 대륙을 강타한 탄저병으로 쇠고기 값이 급등하자 영국인들 또한 서부의 드넓은 목초지에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문제는 방목지대에서 5,000마일 이상 떨어진 영국소비자들에게 어떻게 쇠고기를 이동 시키느냐 였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뉴욕의 젊은 발명가 존 베이츠가 발명한 냉동 기술과 막대한 영국자본이 투자된 미국 철도가 서부지역으로 확장되면서 해결되어졌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쇠고기 이동수단이 생기자 미국의 쇠고기 수출량은 급증하게 된다. 영국인들은 지방이 촘촘히 박힌 쇠고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그러한 쇠고기를 만들기 위한 방법이 연구되었으며 그 방법으로 도살하기 전에 옥수수를 먹이는 방법을 개발되었다. 이로써 목축업과 옥수수가 결합하게 된다. 1900년경이 되며 서부 초원은 이미 소들로 포화 상태가 되어 목축업자들은 더 이상 소 떼를 방목할 수 없게 되어 이후로 점점 더 많은 소가 옥수수에 의존하여 사육되었다. 영국이 소떼에게 옥수수를 먹이기 시작한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1억 6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미국 농경 지대에서 재배된 2억 2,000만 톤의 곡식이 소를 비롯한 다른 가축들에게 소비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6억 톤의 곡식이 가축들, 그 대부분이 소의 먹이로 사용되며 이 곡식이 인간에게 소비된다면 지구상의 10억의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생명을 참혹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쇠고기 산업 늘어난 쇠고기 산업으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미국의 정육업체는 미국 경제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쇠고기가 대량생산이 되면서 정육업체의 모든 공정은 기계화되고 분업화되었다. 초기 소를 도살하는 과정은 오랜 동안 숙련된 숙련공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기계화되고 분업화되면서 그런 숙련공은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저렴한 비용의 이민자들과 흑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었다. 사람들은 컨베이어 시스템이 자동차공장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헨리 포드는 “자신의 자동차 조합 공정에 대한 발상은 쇠고기를 손질하는 데 사용되는 시카고 포장공장의 궤도 장치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회고했다. 체인과 궤도 장치로 분업화된 정육과정은 유사 이래 수천 년간 소를 숭배하던 의식이 자리잡을 시간을 빼앗아버렷다. 체인에 의해 궤도에 걸린 도살된 소는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로 해체되어 버렸다. 단순노동자로 대체되어 자동화되고 분업화된 도축과정은 많은 사고를 유발했다. 1시간에 300마리의 소를 처리하는 속도를 감안하면 사고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988년에는 미국내 전체 13만 5,000명의 정육 포장산업 노동자들 가운데 4만 5,000명이 재해를 당했다. 이렇듯 인권이 무시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인하여 일부 공장들에서는 한 달 만에 무려 43%의 전직률을 보이는 곳도 있다. 또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을 처리해야 하는 도축 작업장의 위생상태는 열악할 수밖에 없다. 공개된 USDA의 내부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저장된 고기들과 각종 첨가물이 엄청나게 많은 쥐들과 해충들의 접근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고 “담배를 피우며 뱉은 침과 고기가 같은 장소에 있었고...... 그것들은 한데 모아져 압축기 안으로 들어갔다.”라고 보고했다. 검사시스템에 대해서도 SIS체계에서는 검사관들이 1분에 30개의 소간을 검사해야 하는데 실제로 2초마다 소간이 지나가면 검사관은 그것이 정상인지 아닌지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또 명확하게 이상이 있다고 확신하기 이전에 생산 라인을 멈출 수 없으며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생산 라인을 중지시킬 수 있는 권한이 연방 검사관들에게는 없기 때문에 SIS체계 하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불평을 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한다. 배부른 소떼와 굶주린 사람들 현재 전세계적으로 10억 마리 이상의 소가 있다. 미국에서는 1억 마리의 소가 사육되며 29%에 달하는 땅이 소를 사육하기 위한 방목지로 사용된다. 또 미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가축 사육을 위해 소비되고 있다. 사육장에서 소고기 1파운드를 얻기 위해서는 약 9파운드의 사료가 소모된다. 쇠고기 자체만을 생산하는 데 고작 사료의 11%만이 사용되고 나머지는 소의 생명활동으로 소비되어 버린다. 현재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섭취할 수 있는 1억 5,700만 톤에 달하는 곡물과 콩류, 야채 단백질이 사람들이 1년 동안 소비할 동물성 단백질 2,800만 톤을 생산하기 위해 가축 사육에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낭비된 1억 2,000만 톤의 곡물은 모든 지구인들이 1년 동안 날마다 곡물 1컵씩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부유한 나라에서는 쇠고기를 과다하게 소비하는 것을 ‘부유한 삶’을 가장 두드러지게 내보이는 가시적인 상징이다. 이렇게 과다하게 소비하는 육식은 여러 질병의 발생을 증가시켰다. 1987년 미국에서 사망한 210만 명 가운데 150만 명의 사망 요인은 식습관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다. C. 에버렛 쿠프 박사는 포화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심장병, 암, 뇌졸중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과다한 지방 섭취는 몇몇 종류의 암과 쓸개 질환에도 관련이 있다. 전염병학, 임상병리학, 동물 연구를 통해 포화지방 섭취와 높은 혈중 콜레스테롤은 관상동맥 질환 및 유방암과 결장암을 발병시킨다는 가능성에 대해 일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밝혀졌다." 쇠고기를 많이 소비하는 서구 세계의 결장암 발생률은 쇠고기 비소비 문화권인 아시아에 비해 10배

글쓴이 김정원 · 사진 4장 · 다음 카페 원문

2010.08.24심행일기(沁行日記)
신헌 지음|김종학 옮김|푸른역사|522쪽|3만9800원.심행일기 '심행일기(沁行日記)'는 1876년 2월 조선이 최초로 맺은 근대적 조약인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일명 강화도조약의 조선측 대표였던 신헌(申櫶·1811~1884)이 조약 체결 과정을 일지(日誌)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서 '심(沁)'이란 강화도 지역의 옛 명칭이다. 따라서 '심행(沁行)'이란 신헌이 조약 체결을 위해 '강화도에 행차했다'는 뜻이다. 강화도조약 체결일(1876년 2월 27일)을 전후하여 1월 30일부터 3월 1일까지 한 달간의 조일(朝日) 외교전쟁을 최일선에서 기록한 '심행일기'는 상권(1월 30일부터 2월 18일)과 하권(2월 19일부터 3월 1일)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권은 소실된 것으로 전해져오다 2009년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고, 이번 번역을 통해 일기의 전모를 누구나 읽어볼 수 있게 됐다.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시작해보자.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벗어나 개화론자들이 목소리를 조금씩 높여가던 시기였다. '접견대관'으로 신헌이 뽑힐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무관 출신이면서도 서예와 문장에 능해 '유장(儒將)'이라는 명성을 얻었던 신헌은 어려서 정약용과 김정희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그가 개화론자인 박규수의 천거를 받았지만 김정희와 먼 친척인 대원군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학문적 배경과 무관치 않았다. 신헌은 1월 30일 임명을 받고 2월 1일 강화도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일본측 인사들과 밀고 당기는 신경전이 이어진다. 그동안 이 부분은 대부분 일본측 자료를 통해 소개됐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우리가 당하는 식의 묘사가 많았다. 그러나 신헌의 일기를 보면 군사적 위협 속에서도 우리측이 시간 끌기와 간첩 활용 등을 통해 조금이라도 덜 불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일기에는 본인의 교섭활동뿐 아니라 강화유수나 인천부사 등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도 함께 수록돼 있어 일본과의 교섭과정을 입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당시 강화부사는 접촉 초기 일본의 의도에 대해 이렇게 보고한다. "그 정상을 살펴보건대 겉으로는 마치 화호(和好)를 추구하는 듯하지만 안으로는 실로 화기(禍機)를 감추고 있으니 국가의 안위(安危)가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열흘간의 실랑이 끝에 2월 10일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와 조선 대표 신헌의 만남이 이뤄졌다. "조약은 무슨 사안인가?"라는 신헌의 물음에 구로다는 "귀국 지방에 개관(開館)해서 함께 통상하는 것이다"고 답한다. 이에 대한 신헌의 응답이다. "이제 재화와 이익을 교환해서 도처에서 유통시킨다면 우민(愚民)들의 범법이 반드시 이로부터 크게 늘어날 것이다." 통상에 대한 조선 관리의 이해수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교섭이 사흘쯤 지나자 신헌의 시간 끌기에 구로다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장차 수만명의 군대가 상륙하는 폐해가 있을 것이다. 미리 잘 헤아려서 양국이 우호를 잃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이에 신헌은 "은연중에 공갈(恐I·공하)하는 말이 있었으니 지극히 분했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조약 체결은 조금씩 진척되고 있었다. 2월 20일 서명을 앞두고 일본은 조약문 마지막 부분에 조선국왕의 어보(御寶·옥새)를 찍어야 하며 어명(御名)을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신헌은 "어명은 막중막엄해서 신하가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감히 문자로 쓸 수 있겠는가"라고 맞섰다. 구로다는 국제적 관례임을 들어 국왕의 서명과 옥새의 날인을 요구했지만, 신헌은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하된 자가 감히 군부(君父)께 청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귀국에서 이 일로 인해 절교한다면 그것은 아무 이유 없이 고의로 단절하려는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2월 27일 마침내 신헌과 구로다 사이에 12개조로 된 조약의 체결이 이뤄졌다. 어명은 없이 '大朝鮮國主上之寶(대조선국주상지보)'라는 어보만 찍혔다. 3월 1일 신헌 일행은 고종에게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누구보다 자세하게 일본의 '힘'을 보았던 신헌은 오랜 문답이 오간 끝에 마지막으로 고종에게 이같이 말한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성지(聖志)를 분발하셔서 신속하게 우환을 막을 수 있는 처분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리하시면 군국(軍國:統軍治國)에 큰 다행일 것입니다."     최초로 완역하는 [심행일기沁行日記]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형식의 조약이자, 이후 진행된 비극적인 한일사의 시발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외교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이다.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은 당시 조선 측 접견대관이었던 위당威堂 신헌申櫶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경과를 기록한 [심행일기沁行日記](2책)를 최초로 완역하여 소개하는 역주본이다. 일본 메이지 정부에서는 이른바 서계書契 문제와 1875년의 운요호 사건의 책임 소재를 밝힌다는 명목으로 1875년 12월 19일 구로다 키요타카를 전권변리대신,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부대신으로 임명하고, 군함 2척이 포함된 총 6척의 선박에 약 800명의 수행원과 군인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강화도에 일방적으로 파견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 조정에서는 1876년 1월 30일에 판중추부사 신헌을 접견대관으로, 도총부부총관 윤자승尹滋承을 접견 부대관으로 임명하여 구로다 일행의 요구 조건을 파악하고 그들을 설득해서 돌려보내는 임무를 맡겼다. [심행일기]는 신헌이 접견대관으로 임명된 1월 30일부터 일본 측의 요구에 따라 근대적 조약을 체결하고 고종의 어전에 보고를 올린 3월 1일까지의 경과를 담고 있다. '심沁'이란 강화를 부르던 옛 이름이었으니, '심행일기沁行日記'는 '강화도 행차의 일기'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신헌은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총 3차례에 걸쳐 개최된 공식회담의 기록뿐만 아니라, 양측 수행원 사이에서 진행된 실무진 교섭 기록, 접견단의 행적, 주요 공문서 등을 망라해서 수록했다. [심행일기]가 국내 학계에 소개되는 것은 1940년에 당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다보하시 키요시田保橋潔가 쓴 [近代日鮮關係の硏究](2책)에서 그 일부가 인용된 이후 약 70년 만의 처음의 일이다. 당시 다보하시 교수는 [심행일기]의 하권이 산일散逸되었다고 기록했으나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에서는 [심행일기]의 상권과 하권을 모두 새로 발견해서 번역하고 원문까지 수록했다. [심행일기沁行日記] 완역 그 이상의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 1) 부록으로 보는 강화도조약 [심행일기 -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에서는 [심행일기] 뿐 아니라 강화도조약과 관련한 주요 자료를 부록으로 수록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강화도조약 당시 신헌의 수행원이었던 추금秋琴 강위姜瑋가 남긴 [심행잡기沁行雜記]를 꼽을 수 있다. 강위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등과 함께 조선 근세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문인이자, 초기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개화 사상가였다. 그가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서울에 돌아와 조약 체결의 경과 및 자신의 의견 등을 일종의 비망록 형식으로 남긴 글이 바로 [심행잡기]이다, [심행잡기]는 관변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약 실무자의 생생한 체험과 진솔한 소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또한 부록2에서는 구로다 키요타카가 남긴 [사선일기使鮮日記]를 토대로 일본 사절단의 행적을 일자별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심행일기]와 [사선일기]의 기록을 비교하며 강화도 조약의 경과를 좀 더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부록3에서는 신헌의 장자인 신정희申正熙가 남긴 신헌의 행장行狀과 대한제국에서 의정議政 등을 역임한 윤용선尹容善이 쓴 신헌의 시장諡狀도 함께 수록했다. 부록4에서는 [심행일기]의 본문에서 언급된 주요 문서 몇 건을 번역해서 함께 수록하였다. 부록에 수록된 글들은 모두 이 책에서 처음 번역된 것으로서 독자들... 서문 해제 강화도조약 체결 과정의 주요사건 일지 심행일기 상 사진으로 보는 강화도조약 심행일기 하 [부록] 1. 심행잡기沁行雜記316 2-1. 선고 판중추부사 부군 행장先考判中樞府事府君行狀 2-2.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신공 시장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申公諡狀 3. 구로다 카요타카黑田淸隆의 [사선일기使鮮日記]에 따른 일본 변리사절단의 주요 행적 4-1. 정월 18일 운현서雲峴書 4-2. 왜관시말倭館始末 4-3. 히로츠 히로노부廣津弘信의 구진서와 별함 4-4. 대원위록기大院位錄記·답상대원군서答上大院君書 [原文] 沁行日記 上 沁行日記 下 沁行雜記 先考判中樞府事府君行狀 輔國崇祿大夫判中樞府事申公諡狀 正月十八日 雲峴書 倭館始末 廣津弘信口陳書及別函 大院位錄記·答上大院君書 찾아보기 부대신(井上聲, 이하 부대신): 지난번에 귀 대신이 말한 종전에 양국의 정의情誼가 단절됨을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는 것은 귀 조정의 뜻인가, 아니면 귀 대신의 뜻인가? 신헌: 조정에 가득한 군신君臣이 모두 민망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거기엔 자못 곡절이 있다. 언급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만약 듣고 싶다면 그것을 말하겠다. 부대신: 국왕전하가 민망하시고 여러 대신들도 민망하다면 기왕의 일을 억지로 들으려고 요청하지 않겠다. 신헌, 윤자승: 억지로 그 일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그 대략을 말하겠다. -[대일본외교문서] 제9권, 문서번호 16, "日鮮兩國國交問題, 雲揚艦事件等二關スル件" (/ p.82) 我: 폐일언蔽一言해서 지난 일들이 얼음이 녹듯이 깨끗이 풀렸는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彼: 잘잘못을 논하지 말고 그냥 놓아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은 참으로 부당하다. 가령 친구와 약속을 하더라도 저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양국 간 교호交互의 정의情誼에 있어서겠는가? 我: 7, 8년 동안 단절되었던 곡절을 이미 남김없이 다 밝혔다. 彼: 그렇게 말하면 일에 결말이 날 때가 없을 것이다. 운요호 사건에 있어서 이제 그것이 우리 선박임을 알았다면 잘잘못이 누구에게 있는가? 당시에 포격한 변방 군사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我: 그것은 알면서 고의로 한 것과는 다르다. (/ '正月十七日條' 중에서) 1과 2는 1월 17일(양력 2월 11일)에 연무당에서 열린 제1차 회담에 관한 일본의 기록과 [심행일기]의 기록 중 일부이다. 일본 측 기록에는 부대신 이노우에 카오루가 운요호 사건에 대해 조선의 왕과 신하들이 ‘민망’하게 여긴다면 굳이 시비를 변별할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자못 관대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심행일기]에 따르면 구로다와 이노우에는 이 문제에 관해 조선 조정에서 반드시 명백한 ‘회오悔悟’의 뜻을 표시해야 함을 강요했다. 심지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조회문마저도 사사謝辭, 즉 사죄 문안으로서의 실제가 없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 본문 중에서) var weekIssueTotCnt = 0; var weekIssueCurPos = 0; function issue_rotateW_honor(to, tCnt,prNo) { if(!(weekIssueTotCnt > 1)) { return; } var totCnt = Math.ceil(Number(tCnt) / weekIssueTotCnt); document.getElementById("rotate_btn_" + prNo + "_" + weekIssueCurPos).style.display = "none"; // 현재 포지션 지정 weekIssueCurPos += to; if(weekIssueCurPos >= totCnt) { weekIssueCurPos = 0; } else if(weekIssueCurPos < 0) { weekIssueCurPos = totCnt - 1; } document.getElementById("rotate_btn_" + prNo + "_" + weekIssueCurPos).style.display = ""; } weekIssueTotCnt = 3; 신헌 [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1876)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는 국빈國賓, 초명은 관호觀浩였다가 고종 조에서 헌櫶으로 개명했다. 호

글쓴이 김정원 · 사진 23장 · 다음 카페 원문

2010.05.06솔로이스트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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